최용식 21세기경제학연구소장
‘9월 달러 유동성 위기설’이 시중에 심각하게 퍼지고 있는 것 같다. 기획재정부 장관까지 나서서 그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말해야 할 정도라면,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현대경제연구원은 ‘국내 외환보유액 얼마나 쓸 수 있나’라는 최근 보고서에서 “경상거래와 자본거래를 모두 포함하는 보수적인 기준으로는 외환보유액이 적정 수준에 비해 568억 달러 부족할 수 있다”고 지적했을 정도이다. 이 문제는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이므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9월 달러 유동성 위기설’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하나는 환율이 상승해야 이익을 보는 부류이다. 그런 부류로는 수출기업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지만, 2001년 1,326원에서 2007년 10월 907원까지 떨어질 때에도 지금처럼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다. 따라서 수출기업이 주도적으로 '달러 유동성 위기설'을 제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에 따른 환율상승을 즐기기는 했겠지만 말이다.
다음으로, 외환선물에 투자한 부류를 꼽을 수 있다. 그 대부분은 국내에 진출한 다국적 금융기관들이다. 이들은 1996년부터 1997년 사이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환율방어에 나섰을 때에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 환율이 1995년 말 775원에서 1997년 말 1,415원으로 상승했으니 이들이 얼마나 큰 이익을 봤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정부는 환율방어에 무려 3백억 달러 이상을 투입했었고, 그 대부분은 고스란히 이들 수중에 들어갔다.
2000년부터 2001년 사이에 정부가 달러를 인상시키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2006년 8월말 1,109원이던 환율을 2001년 말 1,326원까지 끌어올렸는데, 이런 정책이 그들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겨줬다. 국고채권과 외국환평형기금채권 발행이 50조원 이상(약 5백억 달러) 증가했는데, 그 대부분의 이익을 다국적 금융기관이 챙겨갔다. 2003년 말부터 2006년 사이에 정부가 달러하락을 방어하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2003년 말 1,198원이던 환율이 2006년 9월에 945원까지 떨어지던 때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환율 방어에 나섰으니, 그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래 손실만 15조원 이상(약 150억 달러)일 것으로 추정될 정도이다. 이것도 대부분 다국적 금융기관 몫이었다.
다국적 금융기관들은 그 맛을 잊지 못했을 것이 빤하다. 마침 이명박 정권이 새로 들어서자 결정적인 기회가 또 찾아왔다. 이명박 정권은 경제성장에 목을 맬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수출을 촉진해야 하며,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달러를 인상시킬 것이 빤했던 것이다. 때마침 2008년 초부터 국제수지도 적자로 돌아섰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번에도 외환시장에서 엄청난 선물투자를 함으로써 또 한 번 큰 이익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올해 하반기에 들어서자마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물가불안이 심각해졌다. 정부가 인위적으로 환율을 올릴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장도 환율이 오르기 어려운 상황으로 바뀌었다. 6월부터는 국제수지(경상수지)마저 흑자로 돌아선 것이다. 이에 따라 다국적 금융기관들은 엄청난 손실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들로서는 ‘9월 달러 유동성 위기설’을 제기하여 불안감이라도 조성해야 그 손실을 줄이거나 면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 빤하다.
끝으로 꼽을 수 있는 부류는, 다국적 금융기관들의 위와 같은 장난에 놀아나는 일부 경제전문가 그룹이다. 그러나 이들은 ‘유동성 위기’ 혹은 금융위기나 외환위기가 어떻게 벌어지는지조차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금융위기나 외환위기가 다시 터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경제는 자기실현성이 매우 높아서 외환위기가 온다고 자꾸만 떠들면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곤 한다), 설마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애국심이 너무 커서 그런 걱정을 하였을 것이다(애국심도 과다하면 부족함만 못하다). 사실, ‘달러 유동성 위기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가는 그들의 논리가 스스로 증명한다. 우선, 단기외채가 커서 문제라면 단기해외채권도 함께 고려해야 했다. 급하면 단기 해외채권을 얼마든지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흔적은 전혀 없다.
현실적으로도 현재의 단기외채 규모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들어보자. 은행은 들어온 예금의 대부분을 대출이나 투자에 돌린다. 시재금은 기껏해야 2~3%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은행이 곧 무너질 것처럼 떠드는 사람은 없다. 만약 예금주들이 예금을 갑자기 찾아가면 은행은 도산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2007년 은행의 예금은 593조원이었고 대출은804조원이었지만, 은행이 망한다고 떠드는 다국적 금융전문가는 없다. 은행 등 금융기관의 건전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자기자본비율이지 다른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자기자본비율이 8%를 넘는 금융기관은 건전한 것으로 평가한다.
무엇보다, '9월 달러 유동성 위기설'을 제기하는 자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미래형 예측을 비슷하게라도 해내지 못했다. 따라서 이번에도 그들은 틀릴 가능성이 훨씬 크다. 우리 연구소의 추정으로는 우리나라의 적정 외환보유고는 약 9백억 달러인 것으로 보인다. 설령 5백억 달러 수준으로 떨어지더라도 외환위기와 같은 극단적인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이런 규모에 미치지 못하면서 '달러 유동성 위기설'에 휩싸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높은 성장률까지 구가하는 나라도 제법 많기 때문이다. 미국, 스페인, 영국 등이 대표적이다. 이 문제는 뒤에 더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더욱이, '9월 달러 유동성 위기설'을 제기하는 자들은 과다한 외환보유고가 매년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못하고 있다. 과다한 외환보유고 때문에 국고채 이자로 6조원을 그리고 통안증권 이자로 5조원을 매년 지불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런 돈이라면 경부고속도로와 서해안 고속도로를 매년 하나씩 건설할 수 있는데 말이다. 경제전문가라는 자들이 어떻게 이런 사실조차 간과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런 한심한 자들에게 놀아나는 언론은 더 심각한 문제이지만 말이다.
더 근원적인 문제를 하나 더 따져보자. 국제수지가 흑자를 기록하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일까? 적자를 기록하는 것은 무조건 나쁜 일일까? 최소한 경제성장에 있어서는 국제수지가 흑자를 기록하는가 아니면 적자를 기록하는가는 그렇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세계적으로 더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장기간 경제번영을 누리는 나라들 중에는 국제수지가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나라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제수지가 대규모 흑자를 기록한 나라 중에서는 비교적 장기간 성장률이 상대적으로 낮았고 실업률은 상대적으로 높았던 나라들도 있기 때문이다.
국제수지 적자규모가 큰 나라들을 순서대로 꼽자면 미국,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이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2006년 8,115억 달러와 2007년 7,386억 달러를 기록했다. 스페인도 국제수지 적자가 2006년 1천억 달러를 넘겼고, 영국은 775억 달러를 기록했으며, 프랑스는 277억 달러를 기록했다. 한편, 국제수지 흑자규모가 큰 나라들로는 중국, 일본, 독일, 사우디 등을 차례로 꼽을 수 있다. 중국은 2006년에 2,500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고, 일본은 1,705억 달러를, 독일은 1,507억 달러, 사우디는 2005년에 871억 달러 등을 기록했다. 그런데 경제성장률은 미국이 일본에 비해서 1990년대 이래 더 높았다. 스페인과 영국도 마찬가지로서 독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높았다. 사우디는 엄청난 석유수입에도 불구하고 성장률이 3~4%에 불과했다. 중국만 유일하게 대규모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하면서 성장률도 높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국제수지가 흑자라면 해외에서 더 많은 소득을 벌어서 국내수요를 진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말이다. 당연히 국제수지에는 다른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 내막을 잠시 살펴보자. 국제수지 흑자는 통화가치 상승을 부르고 이것은 국제경쟁력 약화를 의미한다. 만약 국제경쟁력이 약화되면 부진한 경기나마 유지해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던 수출마저 감소할 것이 빤하다. 그래서 국제수지 흑자를 해외투자로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국내 소득의 해외이전을 의미했고, 결국 국내 경기는 부진을 면치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국내 경제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국내 경제전문가들은 대체적으로 국제수지는 무조건 흑자여야 바람직하고 해외채권은 많을수록 좋다고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일본경제의 장기 부진을 지속시키는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였다.